연구 요약
연구 요지 (AI)
조선후기부터 일제초기까지 안산의 토지소유구조 변화를 검토한다.
초록
본 연구는 근대적 토지소유의 성립을 일본의 토지조사사업에 의해 일거에 이식된 것으로 보지 않고, ‘장기적’ 흐름 속에서 검토하고자 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조선후기에서 일제초기에 이르는 200여년 동안 토지소유권과 토지소유구조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경기도 안산군의 토지변동을 구체적인 대상으로 하여 검토하였다. 토지소유구조에 대한 연구는 농민층분해를 위한 전제로서 또는 토지조사사업의 배경으로서 검토되기는 했지만 토지소유구조의 변동 자체를 직접 연구한 논문은 많지 않았다. 더구나 조선후기에서 일제초기에 이르기까지 긴 변동을 추적한 논문은 거의 없었다. 조선후기의 토지소유구조가 어떻게 변이되며, 그것이 갑오개혁기 및 대한제국기에 어떤 변화를 겪은 뒤, 토지조사사업에서 어떻게 정리되어 가는지 추적한 논문은 찾기 어려웠다. 조선후기는 그것대로, 대한제국기 이후는 또 그것대로, 각각 연구시기별로 단절적으로 연구가 진행됨으로써 앞뒤 시기의 연속성의 의미를 포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연구사의 현황이었다. 사회경제적 관행의 축적과 변이의 구체적 양상을 천착함으로써 장기에 걸친 토지소유구조의 변동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본 연구에서는 경기도 안산군을 사례로 택하여 그 문제의 해결을 시도하였다. 안산의 경우에는 개간지를 양전한 石場屯量案이 있고, 광무양안과 토지조사부가 존재한 자료적 장점이 있었다.
1720년 인천과 안산의 경계에 간척된 석장둔은 염기를 빼는 등 작답과정에 민간인을 투입하고 그에 따라 토지소유권을 부여하였다. 간척을 주관한 진휼청은 수조권을 행사하였는데 米 40두, 즉 租 100두의 수준이었다. 민전의 결세가 미 23두이고, 궁방과 아문의 소유지 즉 永作宮屯이 최소 미 80두, 즉 조 200두인 점에 비추어 보면 조 100두는 그 중간에 놓여 있다. 최초 안산군 초산면에 간척된 석장둔과 유사한 유형의 농장은 안산의 바닷가를 중심으로 확대되었다. 안산군 인화면 월입피 지역에도 설치되어 월입피둔으로 불렸다. 석장둔은 수원에 장용외영을 설치할 때 수조권이 넘어갔고, 장용영의 페지 이후 수원부 산하 총리영에 소속되었다. 이 토지 중 일부는 1866년 용동궁에서 매득하여 지주제로 경영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갑오개혁을 맞이하였다. 갑오개혁 이후 전개된 일련의 궁장토, 둔토, 역토에 대한 국가의 정책은 이들 토지에 대한 국가의 소유권, 관리권을 강화하는 방향이었다. 조선후기에는 장토의 기원에 따라 토지소유권의 소재가 다층적이었는데 갑오개혁 이후에는 그러한 기원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다. 조사과정에서 관행을 존중하여 도조책정에 반영하기는 하였으나 一物一權의 토지소유권제도에 입각하여 보면 장토를 국가의 소유로 기정사실화해 가는 방향이었다.
석장둔은 그 와중에서 선희궁, 내장원으로 소속되었는데 다른 장토와 마찬가지로 내장원으로 편입되어 갔다. 간척 당시부터 민간의 소유권을 인정해 왔기 때문에 민간에서는 강력한 반발이 제기되었고, 그래서 광무양전사업에서도 처음에는 석장둔의 토지로 간주되었던 것이 검토과정에서 민간의 소유로 인정되었다. 궁내부 내장원과 정부의 탁지부 사이에 석장둔의 소유권에 대한 입장에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한국을 보호국화한 일제는 재정개혁을 단행하였고, 그 대상으로 궁장토, 역토, 둔토도 포함되었다. 궁장토의 관리권이 탁지부로 넘어가 역토, 둔토에 통합되고 1908년 6월에는 이들 토지가 '역둔토' 국유지로 되었다. 1909년에는 역둔토실지조사를 실시하였고, 1910년 토지조사사업으로 이행되었다. 안산군의 토지조사는 1910년 9-12월에 토지신고서를 제출하게 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석장둔은 민간의 소유지였지만 장용외영, 수원부 총리영, 선희궁, 내장원의 관리를 받으면서 공토화를 강요받았기 때문에 민간에서 완전한 소유권을 행사하는데 문제가 발생하였다. 국가가 소유권을 행사하고자 국유지로 통지한 것이다. 그렇지만 수백년간 민간의 사유지로서 매매되어 온 증거들이 명백하였기 때문에 분쟁의 결과, 민유지로 인정받지 않을 수 없었다.
1720년 탄생에서부터 시작된 토지소유권은 국가의 관리기관에 의하여 수조권이라는 형식으로 소유권 행사에 부분적 제약을 받았고, 갑오개혁 이후 근대적 개혁과정에서 국가적 필요에 의해 공토화를 강요받았고, 일제는 그것을 이어받아 국유지로 편입하고자 했지만, 결국 토지신고일 기준으로 근대적 토지소유권이 확정되었다.
발행 정보
2007. 연구보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