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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지를 통해 본 아산 지역의 조선 후기 사회·경제 변화 -越境地, 田結, 戶口의 增減을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Social and Economic Changes in Asan in the Late Joseon Dynasty through Eupji - Focusing on Yeojeok-gyeong (越境地), Land Holdings, and Changes in Population

연구 요약

연구 요지 (AI)
조선 후기 아산 지역의 토지 결수와 토지 소유권 갈등을 살폈다.
초록
이 글에서는 조선 후기에 제작된 󰡔溫陽郡誌󰡕, 󰡔新定牙州誌󰡕, 󰡔新昌縣誌󰡕, 󰡔忠淸道邑誌󰡕 등의 읍지를 토대로 18~19세기 아산 지역에 나타난 토지 결수와 호구 증감의 배경을 추적하였다. 읍지에 따르면 조선 후기 아산, 신창 등의 해안 지역에는 포락(浦落)-이생지(泥生地)가 생겨나 수원부와 갈등을 벌이고 있었다. 수원부에서는 아산, 평택, 신창, 면천 등에 새로 생겨난 이생지를 자기 지역의 포락지가 옮겨간 것이라며 소유권을 주장하였다. 또한, 이생지를 개간한 토지 중 일부 지역에 새로운 궁방전이 설치되면서 세금을 징수할 수 있는 땅이 더욱 줄어들었다. 수원에 비해 읍세가 열악했던 아산현은 조정에 문제를 제기하여 수원에 빼앗긴 토지를 되찾고, 새로 설정된 궁방전을 폐지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의 배경에는 읍치 이전, 화성 축조, 장용영 설치 등으로 인한 수원부의 재정 부족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 공진창의 기능이 약화된 것도 조선 후기 아산의 읍세가 약화되는 데에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17세기 중․후반까지만 해도 선창을 가득 메웠던 조운선은 군현별 납부 제도와 조세의 금납화가 확산되면서 15척(이후 12척)으로 줄어들었다. 공진창의 기능이 쇠퇴하자, 공진에서 한양을 오가는 상선의 수가 급감하였고, 조졸(漕卒)을 비롯한 거주민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공진이 쇠잔해진 후 인근 지역에 간척된 토지도 모두 수원의 소유가 되었다. 이처럼 아산의 여러 곳에 생겨난 이생지를 수원이 차지하면서 아산, 평택, 당진 등에는 새로운 두입지와 월경지가 생겨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해일, 홍수, 가뭄 등의 자연재해가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특히 1807년 아산과 신창을 강타한 해일은 3년 동안 주민들의 삶을 더욱 어렵게 하였다. 제방이 무너져 농토가 복사되거나 물에 잠기고, 소금을 굽던 염분도 다른 지역으로 옮겨야 했다. 조정에서는 이재민의 구호를 위해 조세를 감면하고, 식량과 종자를 나누어 주었으나 인구의 감소를 막지는 못하였다. 복합적 요인으로 작용한 인구와 토지 면적의 감소는 아산 지역의 사회 구조와 경제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궁방전의 확장과 토지 지배권의 이전으로 조세와 역의 문제에 공백이 생기자 인근 주민들은 세금과 병역을 피하기 위해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거나 수원 인근으로 모여 세금 부담에서 벗어나려 하였다. 일부 주민들은 수원의 읍세에 기대어 아산현의 조세와 공납 징수를 무력화하려 하였다. 이처럼 조선 후기 아산 지역의 사회경제적 변화는 수도와 가깝고 해상 접근이 편리한 지역이 왕실과 유력 세력들에 의해 어떻게 침탈되었는지를 보여주며, 새로운 월경지와 두입지가 어떻게 등장하였는지를 설명하는 대표적인 사례로 볼 수 있다.

발행 정보

2025. 역사문화학회 『지방사와 지방문화(Journal of Local History and Culture)』 Vol.28No.1[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