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 요약
연구 요지 (AI)
광무양안으로 대한제국기 진천의 토지소유구조와 농민층 동향을 분석한다.
초록
대한제국기 진천군의 토지소유구조와 농민층 분해 광무양안(1898~1904년 작성)에 나타난 토지소유 구조를 통해 진천군 농민층의 동향을 분석해 보고 그것을 복원하는 것이 본고의 목적이다. 광무양전사업에 대해서는 사례연구가 진행된 바 있지만, 기존의 연구가 각 지역의 면(面) 단위 정도 분석에만 그친데 대하여 본 연구에서는 진천의 15개면 전체를 분석하여 농민층의 토지소유 구조와 그들의 동향을 면밀히 추적하고자 한다. 동시에 진천군 분석을 전체사 연구를 위해 이용하는 사례연구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역사(또는 지방사) 차원의 분석으로 확장하고자 한다. 이는 진천군의 농민층 동향을 단순한 사례로 검토하고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진천군 전체 농민의 살아있는 역사를 복원하는 것을 의미한다. ‘진정한 의미의 지역사’ 연구 방법론을 모색하는 기초자료로 활용해 보려는 것이다. 이같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광무양안 외에도 많은 자료가 필요할 것이다. 지주경영 문서에서부터 행심책, 깃기 등의 토지문서와 호적, 족보나 향촌자료 등의 자료에 이르기까지 보다 많은 자료가 발굴되어 양안의 한계가 보완될 때 진정한 의미의 지역사 연구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는 이같은 자료들이 확보되지 못한 상태이지만 양안 분석을 토대로 지역사 연구의 기초자료로 삼고자 한다.
첫 번째로는 진천이라는 지역의 특징을 추출하기 위해 농업경영 지대를 크게 평야지대와 중간지대, 산간지대로 나누어 살피고자 한다. 동시에 家戶소유 형태를 추적하여 가호와 관련된 농민층의 존재형태를 추적해 본다. 이같은 시도는 농민층의 소유구조를 좀더 명확히 분석해 내고자 하는 시도의 일환일 따름니다. 예컨대 물레방아 소유 방식을 통해 당시 생산의 현장을 추적하는 것도 진천을 이해하는 좋은 접근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로는 농민층의 토지소유 구조를 통해 빈농층에서부터 소농층, 부농층, 지주층에 이르기까지 각 농민층의 존재형태를 명확히 하는 기초자료로 삼고자 한다. 특히 이들 가운데 소빈농층의 광범위한 존재 형태를 통해 이시기 농민층분해의 하향적 특징을 확인함으로써 1900년대의 구조적 모순과 그에 대한 농업대책이 어떻게 수립되어야 하는지를 검토하는 기초자료로 이용될 것이다. 세 번째로는 진천 농민층 가운데 선진적인 농업경영 형태를 추적해 보고 나아가 구래의 지주경영은 어떠한 방식으로 변화하고 있었는지를 확인해 보기로 한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면(面) 단위에 그친 연구를 통해 지주경영도 축소된 형태로 분석해 내었을 뿐 아니라 다른 면에 대토지소유를 하던 농민을 빈농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따라서 기존의 연구에서 확인될 수 있는 것은 면단위 농업경영을 행하던 자영농이나 중소지주를 확인할 수 있을 뿐 적극적으로 확대경영을 행하던 부농층이나 지주층을 전혀 발견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이같은 점에서 진천군 전체의 토지소유구조 분석은 보다 풍부한 자료를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일제의 1910년 이후의 식민지배와 토지조사사업은 광무양전사업의 모든 것을 부정하였다.그렇지만 일제에 의해 부정된 광무양안에는 진천 농민들의 모든 것이 들어 있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따라서 일제의 의도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보다 분명히 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진천의 모습을 원래 그대로 다시 복원하고 동시에 그 속에서 진천 나름대로 해결해야할 농촌문제가 무엇인지를 확인하는 것도 본 연구의 과제가 될 것이다. ● 한말 진천군의 면리구조 면리제는 조선전기부터 지방행정제도의 하나로 정착하기 시작하였고, <경국대전>에도 면과 리의 행정조직이 수록되었다. 그러나 조선초기의 면은 동서남북으로 구획하는 四方面이었다. 임진왜란 이후부터 면리제에 변화가 발생하였다. 면은 오늘날과 같이 자연경계를 기초로 한 행정구역(지역면)으로 바뀌었다.
특히 17세기 이후부터 정부는 전통적인 오가작통제를 강화하면서 사회변화에 대한 대응으로 면을 조세수취의 단위로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하였다.면 아래의 최하부의 행정단위인 里制는 면과 같은 일관성을 보이지는 못하였다. 우선 하부 자연촌락의 명칭이 里, 洞, 村 등으로 다양하였고, 里의 규모와 편성방식 역시 일정하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보면 행정의 최하 단위로서 里의 중요성이 두드러져 가는 가운데, 17, 18세기에 여러 개의 자연촌락을 묶은 행정촌으로서의 里가 편성, 운영되다가 지속적으로 분해되어 자연촌락 단위의 里가 확정되어 간다고 본다. 1914년 지방제도 개혁 당시를 기준으로 보면 평균 10-30호 정도의 자연촌이 2개 정도가 결합하여 里를 이루었다. 그러다가 일제 하 1914년, 20년의 지방제도 개혁과정을 통해 수 개의 里가 통합 최하행정단위인 里로 편성되었고, 이것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사용되는 지방행정제도의 근간이 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면리제의 변동과정에 대한 역사적 해석과 설명에 대해서는 몇가지 이론이 존재한다. 우선 리의 성장과 변화과정에 대한 이해이다. 면이 국가의 조세수취를 위해 하향식으로 설치된 구획인데 반해 里의 분화는 자연촌의 발달에 따른 공동체의 자치적, 자율적 역량의 성장의 결과라고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다만 이 경우도 里의 분화과정이 지속적인 공동체적 국가기능의 발전과정으로 보는 견해와 그 반대로 한말의 里는 지나치게 작고 소규모로 분화하는 과정에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공동체적 기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이 같은 차이에 따라 일제에 의해 자행된 지방제도 개혁에 대한 해석에도 영향을 미쳐, 일제의 지방제도 개혁이 자생적으로 성장해 오던 공동체의 기능을 일제가 억누르고, 강제적인 지배단위로 변형시켰다는 해석과 그 반대로 공동체적 기능이 성장하여 국가기능으로 확대되어 가는 길은 이미 막혀 있었고, 이같이 약화된 공동체 기능이 오히려 일제에 의한 면리제의 개혁이 빠르고 성공적으로 수행될 수 있는 여건이 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그런데 이같은 견해가 성립하려면 里制의 변화가 과연 자연촌의 성장에 따른 공동체 기능의 자생적인 발전 내지는 자연촌의 분해의 결과였는가라는 부분을 증명할 필요가 있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공동체적 기능이라는 것이 과연 국가기능과 대치, 연결될 수 있는 것인가를 검증할 필요가 있다. 한편 17세기 이래 면리제의 변화는 향촌사회 내부의 권력구도와 운영방식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면과 리가 조세수취의 중요단위로 발전함에 따라 징세, 부역의 단위가 변화하고, 새롭게 증가한 향임층에 부호, 평민층이 대거 진출함에 따라 기존의 사족층을 대신하는 새로운 향임, 면임, 동임층의 등장을 초래하였으며, 기존의 사족적 지배질서에 의해 운영되던 향촌질서와 운영방식, 권력구조의 변동을 가져왔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의 결과와 정도에 대해서는 이견이 존재한다. 기존의 사족, 지주층과 새롭게 성장하는 부농, 평민층의 향촌운영권을 둘러싼 대립과정에 주목하는 견해가 있는 반면, 새로운 향임층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사족 혹은 지역 명망가의 지도력은 쇠퇴하지 않았다고 보는 견해가 대립하고 있다. 실제로 사료상으로도 이러한 경향은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어서 이 시기 향촌사회의 권력의 역학관계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이같은 여러 가지 논쟁이 발생한 원인의 하나로 사족적 지배질서, 향권 혹은 공동체적 기능, 질서에 대한 물적, 사회적 토대의 실체가 불분명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사족적 지배질서, 공동체적 기능과 같은 내용을 이해할 때 지금까지의 연구는 향약, 동약, 面里任의 법제적 기능 등을 통해 접근해 왔다.
그러나 동내의 분쟁해결, 農政의 운영과 같은 임무라도 해당 공동체의 구성원의 성격, 분포, 권력자와 구성원간의 사회적 관계에 따라 권력의 토대, 구성원간의 권력과 대립의 성격, 그러한 기능의 사회적, 역사적 성격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양안을 통해 자연촌락의 내부구조를 분석함으로써 향촌사회 내부의 권력의 토대를 추출하고 나아가 면리제의 구조와 기능에 대해 접근해 보도록 하겠다. ● 1910-50년대 진천의 농촌사회 변동: 이월면 사례 우리는 앞선 공동연구를 통하여 大韓帝國期 鎭川郡의 사회경제구조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진천의 사회경제는 日帝强占과 해방(광복)·분단·전쟁을 거치는 반세기를 통해 어떻게 변화 또는 지속해왔을까? 이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진천군 전체를 분석단위로 삼아 그 변화의 양상을 검토해야 하지만, 이는 하나의 논문으로 소화하기에는 벅찬 주제이다. 이 글에서는 우선 진천군의 7개 읍·면 가운데 한 개의 면의 선택하여 집중 분석해보고자 한다. 20세기 전반기의 面 단위 지방 농촌사회를 살필 때 주된 분석 대상으로는 토지와 가문, 그리고 행정권력과의 관계 3자를 들 수 있다.
경제적으로는 대부분 농업을 근간으로 하는 面의 성격상 토지소유와 농업경영방식을 일차적으로 검토해야 하며, 사회적으로는 전통적인 가문의 영향력을, 그리고 정치적으로는 중앙 행정권력이 면 단위에서 어떻게 지역 주민들과 연결되어 작동하는지를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진천군에서 위의 세 가지 요소를 살펴보기에 적합한 사례로서 이월면을 선택하였다. 이월면은 넓은 평야지대와 구릉지가 적절히 조화를 이루어 농업이 발전한 곳이면서 동시에 전통적인 가문들이 누대에 걸쳐 세거해온 곳이기도 하다. 이월에서 평야지대는 미호천을 끼고 주로 동쪽에서 발달하였는데, 장양들, 잿들, 허멍들, 금천들, 피물들, 봇들, 오야들, 나번들, 칼산들, 자내실들, 중들, 하들, 수포들, 장결이들, 장밤들, 살자리들, 아랫개들 등이 이에 해당한다. 서쪽으로는 武帝峰으로써 栢谷面과 경계를 이루면서 구릉지가 발달하였는데, 이 곳에 주로 양반 집성촌이 발달하였다.진천에서 전통적 문중을 들게 되면 ‘1 놋점, 2 초평, 3 논실’을 거론하게 된다. 1 놋점은 延日 鄭氏, 2 초평은 慶州 李氏, 3 논실(老谷)은 平山 申氏를 말하는 것으로 각기 同族을 이루어 살고 있는 지명을 따붙인 별칭이다.평산 신씨가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논실은 이월면의 노원리에 있는 4개의 자연 촌락 중 하나에 해당한다.
지금까지의 지역사례 연구들에 의하면, 20세기 전반기의 50년간 지방사회 또는 농촌사회는 해방 후 좌우대립, 농지개혁, 전쟁 등을 거치면서 급속히 변동하는 동시에 그 저변에 전통적 요소가 강고하게 존속하는 단절과 지속의 양면성을 지녀왔다.그 양면성 중 어느 쪽이 우세한지, 그리고 그 변화와 지속 각각의 성격은 무엇인지를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사례연구가 축적되어야 할 것이다. 주로 검토하게 되는 1차 자료는 1912년부터 1977년까지 작성된 이월면 <土地臺帳>(‘舊臺帳’), 1950년대의 <농지상환대장>, 그리고 1949년도에 출판된 <梨月面要覽>(申弘澈 著)과 관련 가문의 족보 등이다. (서론에서발췌) ● 한말 진천군 역토의 구조와 운용 1898년부터 1904까지 작성된 光武量案에는 한말 진천의 토지에 대한 다양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는데, 특히 역의 경제적 기반이었던 역토가 주목된다. 비록 이 시기에는 漕運ㆍ烽燧와 더불어 조선시대 교통과 통신의 중추적 기능을 담당하였던 驛은 폐지되었지만,역토는 조선후기 역제 변천은 물론이고 한말 진천군의 사회경제 변동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가 많이 수록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토에 대한 연구는 조선후기의 역사적 특성 및 100여 년 전 한말 진천의 사회상을 이해하고 복원하는 데에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한말 역토에 대해서는 驛屯土 조사사업과 관련하여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다.그리하여 대한제국의 역토조사사업은 근대국가 수립을 위한 경제기반을 마련하려기 위해 역토를 배타적인 국유지로 확인하면서 국가의 지주경영을 강화함으로서 지대수입을 증대하려는 것이었고, 그러한 과정에서 소유권 분쟁 및 지대 증대에 대한 소작농민층과 中畓主의 저항을 초래하였다는 연구성과 등이 축적되었다. 하지만 대한제국기의 역토 연구를 통하여 조선후기 역제가 어떻게 변모하였으며, 한말 역토를 경작하는 사람들의 토지소유나 역토 이외의 토지에 대한 소작 규모 등을 통해 그 들의 생활상을 파악하거나 역이 폐지된 후 역토의 용도 등을 살펴본 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에 본고에서는 한말 진천의 광무양안에 수록된 역토의 구조와 운용을 통하여 먼저 역토에서 드러나는 조선후기의 사회변동은 물론이고 역 제도가 폐지된 후
발행 정보
2004. 충북대학교 중원문화연구소 연구보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