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 요약
연구 요지 (AI)
나주 궁삼면에서 장기간 이어진 토지 소유권 분쟁과 탈환운동을 연구했다.
초록
나주 궁삼면 토지탈환운동은 1888년 戊子年 가뭄을 계기로 京邸吏 全聖暢이 궁삼면의 民有地를 침탈하면서 시작되어, 1970년 농지개혁이 완료되는 시기까지, 약 80여년동안 끊임없이 전개된 토지 소유권 분쟁을 말한다. 나주 宮三面은 한말 枝竹·郁谷·上谷 등 三面을 지칭한다. 한말 삼면의 토지가 경저리 전성창의 농간으로 경선궁에 투박되면서 '三面의 토지가 宮房土'라는 의미에서 '宮三面'이라는 별칭이 붙게 되었다. 나주 궁삼면은 지리적으로 나주시의 서남쪽에 위치하며, 영산강의 배후에 자리하고 있다. 이 지역은 지형적으로 영산강의 지류인 만봉천과 덕산천이 흘러 들고, 이 지류들은 또 다시 많은 개울들을 형성하는 저습지에 해당한다. 이러한 지형적 특성으로 궁삼면은 가뭄과 홍수 등 자연재해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지역이었으며, 근대 이전에는 관개시설도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못한 실정이었다. 그러므로 궁삼면 지역은 한말까지도 未耕地가 많이 존재했다. 이러한 궁삼면의 미경지가 개간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경을 전후한 시기였다. 17세기경 주변의 농민들은 미경지를 개간하기 위해 궁삼면으로 이주하여 마을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8∼19세기를 거치면서, 궁삼면은 주변 농민들에 의해 미경지 개간이 확대되었다. 이렇게 농민들에 의해 개간된 궁삼면 농지는 대부분 논이었으나, 지형적 특성상 '천수답'에 가까웠다.
이러한 지형적 조건으로, 궁삼면 농민들은 한말 계속되는 자연재해 때문에 생계에 위협을 느끼고 있었으며, 1888년 무자년의 극심한 가뭄은 농민들을 급기야 기아상태로 내몰았다. 무자년의 가뭄 피해로 많은 궁삼면의 농민들은 벼 한 포기 심어보지 못한 채 생계를 잇기 위해 땅을 등지고 일시적으로 이 지역을 떠나야만 했다. 1888년 가뭄으로 궁삼면 농민들이 일시적으로 '버리고 간 땅(無亡畓)'은 1,400여두락에 달했다. 이러한 극심한 자연재해가 발생할 경우, 조정에서는 減稅 혹은 免稅 등의 구휼책을 강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조정은 오히려 남아 있는 궁삼면 농민들에게 이농자들의 미납 세금까지 洞徵으로 거둬 들이도록 조치하였다. 이에 京邸吏 전성창이 미납된 세금을 거두기 위해 궁삼면에 내려왔다. 궁삼면에 내려온 전성창은 남아 있는 궁삼면 농민들이 세금을 납부할 수 없는 상황임을 알고, 미남 세금 대납을 조건으로 무망답을 침탈했다. 또한 전성창은 남아 있는 농민들의 토지까지도 미남세금 대납을 조건으로 침탈했다. 그리고 그는 침탈한 궁삼면 민유지를 경선궁에 투탁시켜버렸다. 이로인해 궁삼면의 토지는 민유지에서 궁방토로 전환되었다. 궁삼면이라는 지명 역시 '枝竹, 郁谷, 上谷 등 三面의 토지가 宮房土'라는 의미에서 이 시기에 붙여진 명칭에 불과하다. 이에 궁삼면 농민들은 소작료 불납운동과 법정투정 통해 토지소유권 탈환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1907년 임시제실유 및 국유재산조사국(이후 조사국으로 약칭)은 불법적으로 궁방토에 편입된 민유지를 환원한다는 조치를 내렸다. 이에 궁삼면 농민들은 조사국에 궁삼면의 토지에 대한 민유지 환원 청구를 올렸다 1908년 1월 조사국에서는 궁삼면 농민들의 청원을 받아 들여 궁삼면 민유지를 환원토록 나주군에 조처하였다. 그러나, 몇달 뒤 조사국은 경선궁의 압력으로 궁삼면 토지를 다시 경선궁 소유로 최종 결정하였다. 그 후 궁삼면 토지는 경선궁에 의해 1909∼1910년 동양척식회사(이하 동척)에 매입됨으로써 동척의 소작지로 전환되었다. 1910년대 농민들은 동척을 상대로 소작료 불납운동과 법정투정(광주지방법원→대구복심법원→경성고등법원)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법정투정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궁삼면 토지소유권 탈환투정은 일시적 소강국면에 접어든다. 그러나 1919년 3·1운동과 함께, 궁삼면 농민들은 토지소유권 탈환을 위해 농민집회를 갖는 등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1920년대 초중반 일제 당국을 상대로 대외교섭 활동과 농민집회 등을 통해 토지소유권 탈환을 위한 노력을 계속하였다. 그리고 1925년 궁삼면 농민들은 농민회와 토지회수운동동맹을 조직하여 동척에 조직적으로 저항하였다. 그 결과 1926년 조선총독부는 '家垈'와 '墓田' 등 일부의 토지만을 무상으로 반환하였으며, 궁삼면 토지 소유권 분쟁은 일단락 되었다.
1945년 해방과 함께, 미군정이 실시되면서 궁삼면 농지는 미군정에 의해 동척 소유의 적산으로 분류되어 신한공사로 귀속되었다. 이에 궁삼면 농민들은 미군정과 신한공사를 상대로 토지소유권 탈환투정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미군정과 신한 공사는 궁삼면 농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미군정과 신한공사에 대한 농민들의 불만은 1946년 10월항쟁으로 폭발하였다. 한편,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궁삼면 농민들은 제헌국회에 토지소유권 회복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제헌국회는 궁삼면 농민들의 청원을 받아들여, 1950년 2월 청원 대상 농지에 대한 무상반환' 원칙을 천명했다. 그러나 얼마 뒤 한국전정 등으로 제헌국회의 '무상반환' 원칙은 실효를 거두지 못한채 농지개혁 대상 농지로 편입되었다. 이에 궁삼면 농민들은 전남도의회와 국회 등에 토지소유권 회복을 요구하는 청원운동을 전개하였으나, 또한 실패로 돌아 갔다. 그리고 결국 궁삼면 농지는 농지개혁법에 의해 일반 농지와 같은 조건으로 유상 분배되었다 궁삼면 농지에 대한 상환금이 1970년에 완납됨으로써 약 80여년동안 지속되었던 궁삼면 토지탈환운동은 막을 내리게 된다. 이와 같이 궁삼면 토지탈환운동은 약 80여년 동안 토지소유권을 둘러싼 궁삼면 농민들의 끊임 없는 저항의 역사였다.
즉, 나주 궁삼면 토지탈환운동은 民有地(朝鮮) → 宮房土(韓末-慶善宮) → 東拓 小作地(일제시대) → 신한공사의 귀속농지(미군정기) → 民有地(대한민국정부-유상분배)로 환원되는 토지 소유권 분쟁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약 80여년에 걸쳐 전개된 궁삼면 토지탈환운동은 그 특징을 몇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궁삼면 토지탈환운동의 지향점은 '토지의 소유권 탈환'에 있었다. 궁삼면 농민들은 약 80여년동안 民有地 침탈에 대한 '토지 소유권 탈환'을 목표로 끊임 없이 운동을 전개하였다. 둘째, 농민회와 토지회수운동동맹의 지도부는 유지 및 자작농이 주를 이루었다. 궁삼면 토지탈환운동은 田主들에 의한 토지 소유권 분쟁이었음으로 그 주체가 유지 및 자작농이었음은 자연스러운 이해다. 셋째, 농민회와 토지회수운동동맹의 성격이 상호 보완적이었다는 점이다. 1925년 조직된 농민회는 같은 시기 결사체인 토지회수운동동맹을 결성하였다. 조직 결성 초기에는 두 조직간의 갈등이 빚어지기도 하였으나, 이것은 조직 초기에 운동방향을 둘러싼 지도부들의 이견에 불과했다. 넷째, 궁삼면 토지 탈환운동의 방법은 대단히 다양하였다. 운동의 방법 가운데 가장 주요한 것은 소작료 불납운동이었다. 소작료 불납운동이 갖는 의미는 '궁삼면의 토지 소유권은 궁삼면 농민들에게 있음으로, 궁삼면 농민은 소작인이 아니며 田主다'라는 것이었다.
결국 농민들이 소작료를 자발적으로 납부할 경우, 田主로서의 입장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므로 소작권 불납운동은 궁삼면 토지탈환운동이 갖는 '토지 소유권 분쟁'이라는 의미와 상통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전시기에 걸쳐 전개된 법정투정은 토지 소유권을 확인 받기 위한 대응이었다. 그 외의 운동방법은 농민집회와 대외교섭 활동 및 청원운동 등이었다. 다섯째, 궁삼면 토지탈환운동은 1920년대 여러 사회운동 단체의 호응에도 불구하고 독자적인 운동을 지향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먼저, 사회단체들의 경우, 궁삼면 문제를 일반 소작권 문제로 인식하고 있던 반면, 궁삼면 농민들은 이 문제를 토지 소유권 확보 문제로 보고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궁삼면 농민들은 궁삼면 문제에 사회단체가 연류될 경우, 일제에 의해 사상문제로 확대되는 것을 경계한 조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여섯째, 일제하 토지탈환운동의 성과는 1926년 총독부로부터 墓田과 家垈에 대한 '무상양도 조치를 받아낸 것이었다. 이는 당시 궁삼면 농민들의 요구가 궁삼면 토지 전체에 대한 무상반환이었던 것으로 비추어볼 때 대단히 제한적인 성과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일부 토지에 대한 무상반환조치였다 할지라도 궁삼면 농민들의 지속적인 투정이 없이는 불가능하였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결국 궁삼면 토지탈환운동은 농지개혁에 의해 '유상반환'됨으로써 궁삼면 토지탈환운동의 성과는 절반의 승리에 머무르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궁삼면 토지탈환운동은 田主들의 토지 소유권 분쟁이라는 점에서 근대 이후 한국의 일반적인 농민운동과는 일정한 차별성을 갖는다. 한국근대 농민운동이 지향했던 바는 봉건적 토지소유의 철폐와 경자유전의 실현, 즉 지주적 토지소유의 폐지와 농민적 토지소유의 실현이었다. 이는 토지 소유권의 변화만이 아니라 농업에서의 생산관계의 변혁까지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한국근대 농민운동은 그 전개과정에서 민족운동 및 사회운동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발전하였으며, 해방공간에서는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원칙 위에서 토지개혁을 관철시키기 위한 노력으로 구체화되었다. 하지만 궁삼면 토지탈환운동은 이와 같은 일반적인 농민운동과는 달리, 조선말기 田主들이 불법적으로 때맞긴 토지 소유권을 되찾기 위한 운동이었다. 따라서 이 운동은 농민운동의 주류와는 일정한 거리가 있었고, 이 점에서 식민지 시기와 해방 이후 사회주의 운동단체 혹은 농민운동 단체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식민지시기와 해방 직후 이 운동은 현실적으로 지주인 동척, 신한공사를 상대로한 소작인들의 운동이었고, 또 농민들이 대부분 본래 영세한 田主들로서 토지소유권을 되찾아 경자유전의 원칙을 실현하고자 했다는 것 등을 고려한다면, 이 운동도 크게 보아 한국근대 농민운동의 지류 정도로는 볼 수 있지 않나 생각된다. 또 궁삼면 토지탈환운동은 농민들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치열한 투정이었다는 점에서도 일반 농민운동과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 영세 농민이 대부분인 궁삼면 농민들에게 토지소유권은 사실상 생존권과 같은 의미를 갖고 있었고, 따라서 그들은 지주측을 상대로 어느 농민운동 못지 않게 치열한 기세로 투정을 전개하였다. 또한 지주인 경선궁→동척→신한공사의 착취와 억압의 강도도 매우 높았다. 따라서 농민들의 저항 또한 드셀 수밖에 없었다. 궁삼면 농민들의 투정은 농지상환금이 완납된 1970년 비로소 종지부를 찍었지만, 궁삼면 농민들의 저항의식은 1987년 세지면 농민들을 중심으로한 수세폐지운동, 1993년 쌀시장 개방정책에 따른 대규모 농민시위 주도, 1996년 3월 왕곡여성농민회를 필두로한 나주여성농민회 창립 등으로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즉, 궁삼면 농민들의 저항의식은 현재에도 나주 농민운동의 자양분 역할을 충실히 담당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 근현대 농민운동의 발전적 단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목차
(국문초록) = 6 I. 머리말 = 11 1. 연구사 정리 = 15 2. 연구자료 점토 = 19 II. 궁삼면의 자연지리적 환경과 사회·경제적 배경 = 23 1. 자연지리적 환경 = 23 2. 사회·경제적 배경 = 30 III. 한말 慶善宮의 토지침탈과 농민들의 저항 = 39 1. 戊子年(1888) 가뭄과 궁삼면의 피해 = 39 2. 京邸吏 全聖暢의 토지 勒奪 = 42 3. 慶善宮의 토지침탈과 농민들의 저항 = 49 4. 臨時帝室有 및 國有財産調査局과의 토지 소유권 분쟁 = 52 5. 소결 = 56 IV. 식민지 시기 동척을 상대로 한 토지탈환운동 = 58 1. 동척의 토지 매입과 토지 소유권 분쟁 = 59 1) 동척의 궁삼면 토지 매입과 농민의 지위 = 59 2) 동척과의 법정투정 = 68 3) 3·1운동과 궁삼면 = 75 2. 1920년대 궁삼면 농민회의 조직과 토지탈환운동의 전개 = 78 1) 국내외 사회단체와 궁삼면 토지 소유권 분쟁 = 78 2) 궁삼면 농민회와 토지회수운동동맹의 조직과 활동 = 84 3) 소작료불납동맹과 궁삼면 농민들의 갈등 = 88 4) 궁삼면 농민회의 대외교섭 활동과 동척의 타협안 = 95 3. 1930·40년대 궁삼면 농민들의 동향 = 106 1) 궁삼면 농민들의 생활과 면민대회 = 106 2) 세지 야학운동과 독서회 사건 = 111 4. 소결 = 114 V. 미군정기 농민회의 재건과 궁삼면 농지탈환운동 = 118 1. 해방과 궁삼면 농민들의 활동 = 118 2. 궁삼면 농민회의 결성과 활동 = 124 3. 미군정과 신한공사의 궁삼면 토지 귀속 = 126 1) 궁삼면 농민회의
발행 정보
2003. 전남대학교 대학원 국내박사 학위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