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 요약
연구 요지 (AI)
1920년대 군산·옥구 지역에서 일본의 토지수탈과 농민 저항을 규명했다.
초록
본 연구는 한반도에서 일제의 식민지 경제착취의 일환인 토지수탈의 전진기지로서 군·옥지역에서의 일제의 토지침탈 실태를 규명하기 위하여 군·옥지역의 일본인농장의 형성과 그 성격을 파악하고 이로 인하여 나타난 농민의 저항이 민족운동의 정신으로 승화되었음을 究明하였다.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 경제착취는 토지침탈이 근본 요건이었다. 일제는 한반도의 식민지경제의 지배권을 확립하기 위하여 토지제도의 정비작업을 제1차적인 과제로 내세웠고 군·옥지역은 이러한 토지수탈의 거점적인 지역이 되었다. 군·옥지역이 일제 식민지 경제착취를 위한 토지수탈의 거점이 된 것은 자연적인 천혜의 요지로서 북쪽으로는 금강, 남쪽으로는 만경강이 서해로 유입되는 하구사이에 끼여 있는 연해 지역으로서 농수산자원이 풍부한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일제는 1910년 이전단계에서부터 이미 군산항을 거류조계지역으로 삼아 군· 옥지역의 토지를 불법, 탈법으로 매수하여 식민지 경제수탈의 전진기지로 삼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거류지를 통한 일제의 토지점유는 이미 1894년을 전후하여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1901년경에 군· 옥지역에는 이미 일본인 토지매수면적이 4천여정보에 달하고 있어 식민지 경제지배권 확보의 발판을 마련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1905년 소위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여 조선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기 시작한 일제는 군·옥지역의 토지수탈을 토대로 전국의 주요한 곳에 量地課出場所를 설치하여 토지조사사업을 전개함으로써 본격적인 토지수탈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토지조사사업은 1차적으로 전국농지와 그 부속토지에 대한 세부적인 측량과 농지나 시설에 관한 권리자와 권리내용의 확정에 관한 작업이 주된 것이었다. 이 일은 1910년 소위 한·일합방과 더불어 조선총독부로 넘어가 1912년 '土地調査令''朝鮮民事令' 및 '不動産釜記令' 등을 반포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이와 같이 수행된 토지조사사업의 결과는 식민지 경제착취의 기반으로서 일본인의 토지투기의 공인과 나아가 한반도에서 일본인들이 토지를 集積하게 되는 토지수탈의 합법화의 길을 열어 주었다. 이에 한반도의 경작농민은 토지에 대한 어떠한 권리도 얻지 못한 채 불안정한 소작농으로 전락해가기 시작하였다. 토지조사에 의한 토지수탈작업으로 경제적 수탈의 발판을 마련한 일제는 토지조사 완료 시점인 1917년에 이른바 '朝鮮水利組合令'을 공포하여 토지수탈을 보다 구체화하기에 이르렀다.
수리조합사업은 일제의 본격적인 산미증식계획을 추진하기 위하여 대규모의 토지개량사업을 추진하기 위한 것이었고, 따라서 이 수리조합사업의 핵심은 일본인대지주들의 수리조합사업 참여를 적극 보호하고 지원하는 한편, 官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것이 주요 골자로 되어 있어 일제의 토지수탈과 함께 식민지 경제착취의 의도가 내포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일제는 1908년 최초로 수리조합사업을 실시했던 옥구지역을 모태로 하여 전국에 수리조합사업을 전개하는 한편, 전북지역에 1920년에 萬餘坪에 이르는 전국 최대규모의 益派水利組合을 설치함으로써 수리조합에 의한 토지 지배력을 확대하?던 것이다. 이와 같은 수리조합 사업의 본질은 산미증식의 식민지 경제착취는 물론 수리조합을 통한 지배권을 확대하여 일제의 지속적인 토지수탈정책을 진행시키려는데 있음을 알 수 있다. 수리조합사업과 함께 일제는 간척사업을 통하여 토지수탈을 더욱 구체화하였다. 이것은 동양척식회사의 설립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즉 1908년 동양척식주식회사의 법안을 통과시킨 일제는 당시 형식상으로나마 존재하고 있었던 한국정부와 공동출자를하여 殖産興業을 통하여 조선민족의 생활을 향상시킨다는 허울좋은 미명하에, 조선의 토지를 매수하고 관리· 경영하여 조선농민의 희생을 자본으로 하는 토지수탈의 계략으로서 영리목적의 식민지 경제착취가 그 본질적인 의도였던 것이다.
이때에 군·옥지역에는 이미 1904년 익산과 옥구에 농장을 설립한 것을 모체로하여 不二興業會社가 설립되어 옥구지역을 중심으로 간척농장인 不二農村을 설립하였다. 즉 조계지 개항장을 발판으로 군· 옥지역의 토지를 점유하기 시작한 일제는 동양척식회사의 설립과 함께 간척사업을 단행하여 일본의 이민농가로 하여금 부근토지 및 간척지를 점유하게 하여 식민지 수탈의 근간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는 재지농민의 농업기반의 상실로 인하여 隸農化의 소작농으로의 전락은 일본인지주의 과중한 세부담을 견지지 못하고 결국 조선농민계층은 파멸로 이르게 된 것이다. 토지조사사업과 이에 따른 수리조합사업 그리고 간척사업에 의한 토지수탈에 따른 한국농촌사회에 대한 일본경제로의 편입은 산미증식계획을 통하여 그 수탈정책이 지속되었다. 일제에 의해 지속적인 수탈정책으로 산미증식계획이 구체화된 것은 일본 본토에서 물가앙 등에 의한 쌀폭등과 1차세계대전의 여파로 무역의 축소와 식량수요의 증가에 따른 것이다. 이러한 일본내의 사정과 한국내에서 토지수탈을 통한 일본인대농장의 형성조건은 일제의 미곡정책의 보완은 물론, 나아가 한반도 식민통치에 가장 적절한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다
식민지재정의 확보, 산업자본의 형성, 일본상품시장의 확대 등 산미증식계획의 실효성은 큰 것이었고, 토지수탈로 인한 조선인 재지농민의 예농화는 식민지 토착노동을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농민의 토지는 더욱 상실되게 되었고, 일본인 대지주에게 토지집적의 촉진이 가중되었던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산미증식계획은 일본인농장의 확대에 주안점을 두고 있었으며, 이러한 일본인농장을 통하여 파산위기에 놓인 토지를 헐값에 매점하고, 한국인소작인을 최대로 착취함으로써 토지수탈은 거듭 확대되어 갔던 것이다. 군·옥 지역에서 일본인대지주 농장형성은 어느 지역보다 먼저 설치되어 1903년에 이미 宮崎農場, 熊本農場 등이 설립되어 있었다. 이것은 1901년부터 일본인들이 그들의 거류지역을 중심으로 불법, 탈법으로 4천여정보의 토지를 매입하여 그들의 토지겸병에 의한 토지수탈의 농장기반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군·옥 지역은 소위 한·일합방 이전에 벌써 일본인이 농장을 형성하여 일본인농장기업 진출의 최첨단적인 지역적 조건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한반도에서 일본인농장형성의 모태는 군· 옥지구를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
일본인대지주의 농장형성은 결과적으로 그들이 소유한 토지와 그 토지의 효과적인 영농을 위해서 당시의 영세자작농이나 반자작농, 소작농들에 대한 지배권 확립으로 이어졌고, 한국인농민의 예농화 현상을 촉진시켰다. 즉 단순한 예농적 소작인으로 전락함에 따라 영세한 자작농, 자작겸소작농, 소작농이라는 형태로 농촌계층이 분해됨으로써, 소작농의 예농적 재편성은 일본인농장대지주에 대한 한국인소작농의 경제적 지위를 하락시키게 되었고, 이러한 결과는 일본인농장주들에 대한 반지주적 비판의식을 형성하게 하여 급기야 소작쟁의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소작쟁의는 초기 단순한 경제관계 쟁의에서 점차 발전하여 근대적인 계급의식과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반일감정으로 승화하여 식민지제국에 대한 민족정신의 앙양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군·옥지역에서 1920년대에 일어난 대표적인 소작쟁의는 二葉社농장의 소작쟁의 였다. 二葉社농장의 소작쟁의는 다른 어느 지역보다 고을의 소작료를 징수한데서 군·옥지역의 소작농들이 조직적으로 저항한 농민저항운등의 성격을 띠고 있다. 일제는 二葉社농장의 소작쟁의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소작농들에게 쟁의조정의 성격에 충실하였다기보다는 사상범의 죄명을 씌워 유죄를 선고하였다.
그것은 전국 최대규모의 일본인농장이 밀집되어 있던 군· 옥지역에서의 二葉社농장의 소작쟁의는 일제의 식민지적 지배를 위태롭게 하는 한국민족의 저항운동의 발화가 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던 것이다. 1920년대의 군·옥지역의 농민운동은 二葉社농장의 소작쟁의 例에서처림 대부분 조직적 결성을 통한 저항운등으로 나타났으며, 이것은 야학과 결합하여 대중속에서 민족정신으로 앙양되고 있었다. 군· 옥지역에 있어서 이와 같은 농민저항은 단순한 경제적 투쟁을 넘어서서 일본인농장지주의 토지수탈에 의한 경제적 착취에 대한 계급의식을 지닌 항거적인 민족운동의 성격을 지닌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일본인농장지주와의 단순한 쟁의라기보다는 당시 일제의 식민지지배와의 투쟁으로 승화된 성격을 띤 것이다. 이와 같은 일본인농장에 대한 소작쟁의는 식민적 경제수탈에 대한 지주의 수취체제에 대한 항쟁과 나아가 일제의 군경통치와의 투쟁으로 식민체제를 부정하려는 독립운등으로의 민족정신 앙양의 성격이 강하였다. 결국 군·옥지역은 한반도에서 일제의 식민지 경제착취의 거점인 토지수탈지역의 시발지역으로서 일본인농장형성의 모태를 제공하였으며, 그에 따른 한국농민의 예농화 현상은 농민저항정신으로 계승되어 항일민족해방운등으로 승화되는 민족정신 앙양의 본원지가 되는 역사성을 갖게 된 것이다.
This research is intended to grasp the formation of the Japanese-style farm resulting from Japanese imperialism around the Gunsan-Okgu district which acted as an outpost for Japanese plunder. We're going to closely examine this plunder which came about as a direct result of the fundamental Japanese policy of economic exploitation in the Korean Peninsula and the decline in Korean patriotism resulting from Japanese racist attitudes. The top priority of the Japanese colony was land plundering. It was the first step towards establishing financial control of the Korean colony. The main means towards achieving this was through the reshuffling of the land system in Korea.
The general conditions of the Gunsan-Okgu area, including its abundant agricultural and fishing resources and its geographical location between the Gold and ManKyong rivers made it the primary target of land plundering and economic exploitation in the newly established Japanese colony. Japan had already established the Gunsan port as an advance base which was to be utilized as the outpost from which economic plundering could be staged. This plundering focused on the acquisition of land which was achieved through the forced sale of Korean held farm land to the Japanese. The Japanese had begun this system of land acquisition through illegal means as early as 1894.
By 1901, the amount of land purchased by Japanese foreigners in the Gunsan-Okgu area was close to 4000 jungbos(a jungbo is a standard measurement of land common to this period in history). It was at this point the Japanese began readying the Gunsan-Okgu area as the primary base from which imperialist expansion and the creation of a colony economy coul
발행 정보
2001. 원광대학교 교육대학원 국내석사 학위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