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 요약
연구 요지 (AI)
마을재산, 특히 마을 산의 소유권 발생과 변동을 역사적으로 연구했다.
초록
마을재산은 마을 주민들이 공동으로 소유하는 재산으로 동네재산이라고도 한다. 근대국가의 행정단위체제가 성립되기 이전, 부락단위로 거주하던 당시에도 마을 주민들이 공동으로 이용하던 마을 산 등이 존재하고 있었다. 마을 산의 경우에는 조선시대 경국대전이나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초지장이나 입회 등으로 그 흔적을 보이고 있다. 조선왕조 경국대전 형전 금제에서는 “私占柴草場者並杖八十”이라고 하여 시초장에 관한 기록이 나오고,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시초장에 관한 기록은 많이 있고, 이 마을재산에 대한 개인의 사점은 금지하고 있었다. 경국대전의 시초장은 산지이용 입회권에 관한 성문법으로, 조선시대 후기와 대한제국까지 강력한 규정으로 시행되어 왔다. 조선시대에는 토지에 대한 개인소유가 인정되었는지 여부에 대하여 논란이 있지만, 최근에 발굴되고 있는 조선시대 왕조실록, 소지나 문기, 입안 등을 이용하여 천착된 선행연구에 의하면, 임진왜란이후부터 토지제도의 문란으로 인하여 토지의 사유화가 진행되었고, 더불어 송계, 동계 등 마을 공동재산이 많이 발생하였던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마을재산은 주민 개인이 소유하는 재산이 아니라 마을 주민들이 난방이나 취사연료로 사용하기 위한 땔감을 장만하거나, 소나 말 등 가축을 사육하기 위한 사료용 풀을 얻기 위해서 마을 뒷산 등 임야를 집단적으로 이용하거나 사용하는 과정에서 발생하였다.
일제는 삼림령 시행과 토지조사사업, 임야조사사업의 실시과정에서 빚어진 소유자확정의 혼선에 대하여 그 오류를 시정하고자 조선국유삼림미간지 및 삼림산물특별처분령(1911년, 대정원년)에 의해서 특별연고권자로서 입회관행을 가진 마을과 조선특별연고삼림양여령(1926년, 대정 15년)에 의해서 특별연고권자로서 1908년 삼림법 제19조에 의해서 지적제출을 하지 않아서 국유로 귀속된 종전 소유자에게 무상 양여하기도 하였다. 다른 한편 일제는 1930년 이전까지는 마을(里洞)에 대하여 관습법상 법인격을 인정하였지만, 1930년 12월 ‘읍면제’와 ‘읍면제 시행규칙’으로 행정조직을 개정하고 1931년 3월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이에 따라 읍면에만 법인격을 부여하고, 리동에 대하여는 법인격을 상실시키고 종전의 里洞의 재산을 읍면으로 귀속시켰다. 해방이후 우리나라에서는 1960년대까지 동네 뒷산에서 집에서 기르는 가축의 먹이로서 풀을 베기도 하였고, 그곳에 소나 말을 방목하여 풀을 뜯어먹게 하였다. 또한 부엌 취사용이나 난방용으로 나무를 베어 오기도 하였다. 이러한 관행은 비록 뒷산이 마을 산인 경우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의 소유, 특히 국가소유 등 국공유림인 경우에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 1961.9.1.
제정된 지방자치에 관한 임시조치법(시행 1961.10.1.) 제8조에서는 읍, 면의 일체의 재산과 공부는 소속군에 귀속한다고 규정하여 읍면의 동네재산이 모두 군재산으로 되었다. 이처럼 행정조직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면서, 마을재산을 법률에 의해 군유재산으로 귀속시켰다. 다른 한편, 이러한 마을재산은 우리나라 최초의 고속도로인 경인고속도로(1967년 3월 24일 착공하여 1968년 12월 21일에 완공)와 2번째 고속도로인 경부고속도로(1968년 2월 1일 착공하여 1970년 7월 7일 왕복4차선 도로로 준공) 등 국가적인 SOC사업을 하면서 토지보상금의 주체가 누구인지 여부가 사회적인 문제가 되었고, 이에 따라 해결하기 위해서 임야소유권이전등기 등에 관한 특별조치법(1969년 6월 30일~1971년 12월 19일)을 제정하는 등 각종 대책을 강구하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많은 마을 재산들이 사라지기도 하였다. 특히 1977년에 제정된 부동산소유권이전등기 등에 관한 특별조치법(1978년 3월 1일~1984년 12월 31일)은 명시적으로 마을공동 재산에 대하여 간편한 절차에 따라 이전등기를 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많은 마을재산에 사라지게 되었다.
발행 정보
2013. NRF KRM(Korean Research Memory) 연구보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