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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서울의 공간문제와 광주대단지 사건

연구 요약

연구 요지 (AI)
수도권정비계획과 경기지역 토지이용 규제의 법적 정비방안을 연구한다.
초록
1960년대 국가가 주도하는 수출 중심 산업화 전략은 세계 자본주의 체계로의 종속을 심화시켰다. 그 과정에서의 직접적 피해자인 이농민들은 도시 빈민으로 전락하였고, 서울의 도심 지역에 무허가 정착지를 대규모로 형성하게 된다. 1960년대 중반부터는 도심 개발로 이익을 창출하고자 하는 자본의 논리가 정책에 관철되면서 서울시는 ‘무허가주택의 양성화, 시민 아파트 건축, 정착지 조성’이라는 무허가주택 一掃政策을 추진하였고, 도심의 무허가 정착지는 해체되기 시작한다. 광주대단지는 서울시에 의해 ?일단의 주택지경영사업? 대상지로 선정되어 대규모의 철거민을 이주시키는 사업이 실시된다. 그러나 이 사업은 국가와 서울시의 정치적?경제적 목적에 의해 서둘러 시행되었기에, 그 계획 단계에서부터 여러 차례 변경과 수정이 가해지면서 졸속적으로 시행이 강행된 것이었다. 특히 주택지로서의 입지 조건보다는 개발 투자를 위한 재정적인 측면이 고려되었기에, 국공유지의 비중이 높으며, 임야와 구릉지가 많아 토지 수용과 매수 비용이 저렴한 이 지역이 선정되어 지금의 비정상적인 성남의 도시경관이 탄생하게 된다. 이 시기에는 자본에 의한 도심의 무허가주택 정비 요구도 가열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철거민들은 ‘先入住 後開發’ 정책에 따라 주택은커녕 택지 정리도 다
이루어지지 못한 상태에서 천막에 ‘假收容’ 되었고, 이는 공간적?사회적인 고립과 반강제적인 실업이라는 부정적인 결과를 낳게 되었다. 이후 서울시는 자구적 생계 대책마저 없는 공간에 대한 개발 투자 촉진을 위해 광주대단지 건설을 대대적으로 선전하여 부동산 투기 자본을 적극적으로 유치하였고, 토지 투기와 전매 행위가 활성화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였다. 여기에 1971년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를 거치면서 정치권의 선심성 공약 남발이 더해지면서 대단지의 투기와 건설 붐은 절정에 달하게 되었다. 그러나 선거가 끝나자 전매 금지 조치와 분양지 대금 일시 상황, 주택 취득세 방침이 발표되었다. 이에 주민들은 ‘광주대단지 토지불하가격 시정대책위원회(대표 박진하, 이후 투쟁위원회로 전환)를 구성하고 불만을 표출하기 시작하였고, 결국 생존권 요구는 1971년 광주 대단지 사건으로 폭발하였다. 대단지 사건 이후 양자의 함 관계, 즉 국가의 정치?경제적 역량의 변화에 따라 철거와 양성화 방식 사이를 오가면서 다양한 정비 정책들이 실험되었다. 하지만 도심 공간을 자본제적으로 재편성하려는 정책 목표는 일관되게 관철되었다. 즉 국지성과 일회성으로 전개되는 사건으로는 끊임없이 자기 변신을 하면서 국가 정책을 통해 관철되는 ‘도시 공간의 자본제적 구조화’ 논리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한다.
이에 따라 결과적으로는, 형식적으로만 도시 빈민이 제도권에 포섭할 뿐, 궁극적으로는 이들의 주거 공간과 생활기반은 해체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발행 정보

2015. 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 국내석사 학위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