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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년 러시아의 농노제 폐지와 농민의 농업경영 : 상뜨 뻬쩨르부르그 주를 중심으로 = Отмена крепостного права года в России и крестьянское хоэяйство : на примере Санкт-ПетерБургской гуБернии

연구 요약

연구 요지 (AI)
러시아 농노제 폐지 이후 농민의 토지문제와 농업경영 변화를 살폈다.
초록
1861년 농노제의 폐지는 러시아 역사의 중요한 분기점 가운데 하나이다. 시대구분의 중요한 전환점이자 경제 사회적 변화의 동인으로서 농노제의 폐지에 대해서는 그동안 다양한 측면에 걸친 수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농노제의 폐지가 농민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의 문제는 아직도 논쟁의 단서가 되는 중대한 사안으로 남아있다. 특히 농민의 토지문제는 어떻게 해결되었으며 농민들의 농업경영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가? 그동안 이 문제를 규명하는데 있어 인민주의자들과 레닌 사이의 논쟁은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국가주도 산업화에 의해 러시아 사회가 변화가 분명해지는 시기에서 자신들의 주장의 근거를 찾았으므로 정작 농노제 폐지 당시와 이후 20년 동안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적은 관심을 보였으며, 이러한 경향으로 인해 이 시기를 규명하려는 노력이 적었다. 본 논문에서는 농노제의 폐지 과정과 그 후 20년에 걸친 시기에 상뜨 뻬쩨르부르그 주 농민들의 삶을 추적해 봄으로써 농노제 폐지가 농민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켰는가, 특히 농업개혁 과정에서 농민에게 주어진 분여지는 과연 농민의 농업경영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하였다.
이는 상뜨 뻬쩨르부르그 주라는 수도 인근의 농촌사정을 지방사 연구의 방법론에 입각하여 살펴봄으로써, 러시아 제국 전체, 혹은 유럽러시아 전체를 대상으로 농노제폐지 이후의 농촌현실을 논해온 기존 연구들이 가지는 도식적 일반화의 한계를 극복하고, 보다 구체적인 역사상에 접근해가기 위한 시도의 일부이다. 1861년 농노제 폐지의 여러 조건들은 향후 러시아 농민경제의 발전 방향을 크게 규정하였다. 그러나 농민들 또한 자신들 고유의 문화로써 바뀐 현실에 대응하였다. 농노제 폐지 이후 러시아 농민의 삶은 이러한 두 측면의 상호작용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국가주도 산업화의 동력이 러시아 사회를 달구기 전까지는, 아니 그 후로도 오랫동안 비록 수도가 위치하는 농촌지역이라 하더라도 농민들의 정서와 관념 속에 농업사회의 전통적 노동의 윤리가 작동하고 있었다. 특히 농업개혁 과정에서 보존된 농민공동체는 이러한 의식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본 논문에서는 먼저 농민분여지를 둘러싼 중요한 쟁점, 즉 농민분여지의 매입, 그에 대한 의무, 그리고 농민공동체 문제가 결국 1861년 법령에 반영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정부는 지주경영 및 소농경영의 발전에 대한 고려 속에서 농민의 분여지 매입을 허용했지만, 사회불안에 대한 우려 때문에 농민공동체의 존속을 결정하였다.
농업개혁의 결과 상뜨 뻬쩨르부르그 주 농민들의 분여지에 일어난 변화는 개혁 전의 용익지에 비해 평균적으로 34%이상 삭감되었다. 그리고 농민 분여지는 법령의 적용단계에서 각 군에 정해진 최대분여지 주변에 머무르게 되었다. 농업개혁 이전에 다양한 편차를 보이던 농민분여지는 농업개혁의 과정에서 하향평준화하여 단일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농민들은 이러한 축소된 분여지나마 매입하여 자신들의 소유지로 전환하려고 애썼다. 농민들에게 분여지의 매입은 신성한 ‘사적 소유권’과 같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전통적인 노동의 권리를 재확인하는 것을 의미했다. 과중한 상환금으로 말미암아 농민들은 지주의 일방적 요구에 의해 끝까지 미루다가 분여지 매입에 들어가는 경우가 일반적이었지만, 일단 매입과정에 들어가게 되면 농민들은 더 이상 삭감당하지 않는 완전분여지를 강력히 주장하고 그것을 결의를 통해 나타냈다. 마지막으로 농민들이 분여지 매입 상환금이 과중하게 매겨진 매입과정에 들어간 후에 상뜨 뻬쩨르부르그 주 농민들의 농업경영에 나타난 변화의 양상을 살펴보았다. 물론 농업개혁 이후 20년 동안 모든 농민들이 동일한 변화를 겪은 것은 아니었다. 상뜨 뻬쩨르부르그 주의 8개 군 가운데 본 논문에서 선택한 3개의 군에서는 각 마을마다 다양한 모습이 나타났다. 각 군은 수도와의 관련성, 그리고 농업개혁 당시에 겪은 분여지 삭감의 정도에 따라 다른 양상을 보였다.
수도와 매우 가까운 곳의 농민들은 빠르게 도시에 흡수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주었는데, 이러한 마을은 농업개혁 과정에서 분여지 삭감이 매우 크게 일어난 결과, 농업경영의 기반이 침해된 경우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농업개혁 과정에서 큰 변화를 겪지 않고 농업경영의 기반이 크게 훼손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농민들은 계속 농업경영을 하였다. 한편, 수도로부터 25베르스따 이상 떨어진 곳에서 농민들은 수도에서의 품팔이노동보다는 농업과 지방의 산물을 이용한 부업에 더욱 매진하였다. 이것은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노바야 라도가 군과 그도프 군에서 농민들이 겪은 변화양상과 비슷하다. 상대적으로 부업의 가능성이 높았던 노바야 라도가 군과 달리, 농업 이외의 별다른 소득이 없던 그도프 군의 농민들은 토지재분배공동체의 영향을 받으며 더욱 땅에 밀착하였다. 이렇게 보면, 일반적인 농민들은 변화의 “희생자”나 진보의 가장 완강한 “방해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농업개혁 과정에서 삭감된 분여지를 가족 노동력과 농민공동체의 도움을 받으며 힘겹게 경작하거나 일감을 찾아 외부로 떠나 자신들의 생존방식을 찾아갔던 소생산자였다. 별세계였던 수도와 수도 부근을 제외하고 수도의 변두리와 나머지 군들의 농촌에서 농민들은 여전히 농민공동체의 주요한 속성인 토지재분배에 의해 계속 토지를 재분배하였고, 매우 느리게 분여지 매입을 위한 상환금을 불입해 나갔다.
자본가적 부농이나 프롤레타리아적 빈농이라고 부를 수 있는 농민그룹은 적게 마주쳤으며, 그러한 농민집단은 수적으로 매우 작아서 공동체의 삶을 통제할 수 없었다. 이와 달리 대부분의 농민들은 농업개혁 과정에서 받은 분여지의 몫을 포기하지 않았고, 그들은 분여지소유자라는 단일한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토지재분배공동체 역시 소수의 부농에게 토지가 집중되는 상황을 막았다. 특히 농업개혁이 부과한 분여지 매입 상환금과 조세부담은 일반적으로 농민들이 부업과 품팔이노동을 통해서 벌어들이는 소득을 초과함으로써 자본축적의 가능성을 제한했다. 그러한 결과, 농민공동체 전체 혹은 개인에 의한 분여지의 임대차 그리고 농민의 토지구입은 아직 소규모였으며 농업개혁과정에서 삭감된 손실을 메우는 수준에 그쳤다. 결국, 상뜨 뻬쩨르부르그 주의 농촌에서 농민들은 시장을 위한 생산으로 몰아 부치는 자본주의의 궤도 속에서 화폐, 시장관계, 소유권에 대해 차츰 눈을 뜨면서도 농민공동체가 부과하였던 여러 전통적 가치들을 보유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토지재분배공동체는 농노제 폐지 이후에 그 기능이 강화되어, 전통적 가치들이 유지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산업부문에서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던 이 지역의 농민공동체는 역시 제국의 외곽에 분포하고 있던 농민공동체와는 많은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배제해서는 안될 것이다.
아울러 뻬쩨르부르그 군에서 확인되었던 경우로서, 타향 전입자의 증가는 앞으로 농민공동체 내부의 구성원들 사이에서 다양한 직업과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나타날 가능성을 만들어 주었고, 농민공동체의 전통적 기능도 점차 변화할 수밖에 없었다는 측면도 균형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발행 정보

2003.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내박사 학위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