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 요약
연구 요지 (AI)
부산·진해만 요새 구축 과정에서의 군용지 강제수용과 군사시설 건설을 연구했다.
초록
본 논문은 부산·진해만 일대를 대상으로 일제의 한반도 침탈과정에 대해 살펴보고, 요새 구축을 위한 군용지 강제수용과 더불어 요새의 건설 배경 및 공사를 주관한 조직인 축성부와 청부업자들의 실체를 밝히고 당시 건설된 군사시설의 공사과정 및 시설물 현황 등을 규명하는 것이 목적이다. 부산・진해만 일대는 일본의 입장에서 대륙진출을 위한 교두보이자 대륙을 연결하는 최단거리의 수송항으로 조선시대부터 전략적 요충지로 중시되어 왔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치면서 일본에 의해 수많은 왜성이 축조되었고,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인해 가장 먼저 개항하게 되었다. 러일전쟁을 대비하여 그 중요성은 더욱 높아져 일본에 있어서 이 지역은 전쟁의 승리와 한국의 식민지화를 위한 군사시설 확장뿐만 아니라 대륙진출을 위한 영구적인 군사거점 확보를 위해 무조건 선점해야하는 지역이었다. 이에 외양포 및 저도에 포대를 건설한 이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국제 정세가 급박하게 변화함에 따라 부산 및 진해만 일대의 요새를 더욱 확장하게 되면서 지심도포대, 절영도포대, 기장포대 등 더 많은 포대를 건설하게 된다. 일제는 「한일의정서」에 의거, 일본군의 영구적인 군사거점 확보를 위한 군용지 무단 수용에 들어갔다. 1904년 일본군이 규정한 군용지 조사요령에 따라 대규모 군용지 점탈이 이루어졌다.
한국의 국유지, 관유지 등은 한일의정서에 의거하여 무상으로 수용하였고, 사유지 및 민가 등은 일본이 강제 점탈에 가까운 토지 무단수용을 자행하였다. 가옥의 소유주와 등급, 칸수를 기록한 「민가등급표」를 통해 강제적으로 주민퇴거를 시행한 일제는 토지 및 가옥 대금은 일본이 한국정부에 지불하되 서울 용산과 비교하여도 시가에 미치지 못하는 적은 금액을 지불하였고, 한국정부가 이를 주민에게 지급하는 방식으로 실제 보상까지는 3년이나 소요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토지 보상을 가장한 강압적인 점탈과 다름없었다. 또한 부산·진해만 일대에 한국주차군 예하의 진해만요새사령부를 설치한 후 이 일대의 치안을 유지하고 군기보호를 위한다는 목적으로 ‘요새지대법’을 지정하여 요새의 구역을 점점 확장해나갔고, 기밀보호업무를 핑계 삼아 한국인들의 사회활동 전반에 관한 검열과 통제를 통해 식민지 약탈에 더 깊숙이 관여하기 시작했다. 아시아역사자료센터의 일본군 기밀문서 『密大日記』 등에서 나타나는 건축 관련 문건은 주로 방어영조물 건축공사의 신축, 개축, 수선, 준공에 관한 내용이다. 각 공사 실시의 사유 및 시기와 예산서 또는 공사에 관련된 수선비 지출내역이 기재되어 있어 각 포대별 소요금액 등을 파악할 수 있었다.
또한 별지로 첨부되는 도면 및 설계요령서 등을 통해 당시의 포대 배치도와 현황을 비교하고, 각 병영 및 군사시설의 성격 및 화기와 그 부속시설에 대한 자료를 활용하였다. 일제가 규정한 요새화 과정인 ‘요새정비기간’은 부산·진해만요새에서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 일제가 요새 건설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요새건설기’로 러일전쟁이 발발함과 동시에 한국의 대륙진출의 전초작업으로 건설된 저도, 외양포포대가 대표적이다. 둘째 ‘요새재정리기’는 1921년 워싱턴군축회의에서 체결된 태평양방비제한조약을 위반하면서까지 진해 군항경계지역을 무리하게 확장한 시기로 기존의 진해만요새에 쓰시마요새와 함께 부산을 엄호하는 새로운 임무를 부여하여 장자등 제1포대를 건설하였다. 셋째, ‘요새재수정계획기’로 태평양전쟁을 대비하여 지심도포대를 비롯한 장자등 제2,3포대, 절영도포대, 기장포대 등을 건설하여 부산 및 진해만 일대를 철저히 요새화한 시기이다. 한편 요새의 건설공사를 주관한 조직은 육군성 산하의 축성부이다. 일반 병영시설 및 군사시설의 건설을 담당한 조선군 임시건축과와 별개로 축성부는 ‘요새’와 ‘포대’ 건설만을 담당한 기관이다. 요새 건설을 새롭게 구축하기 위한 계획 단계부터 준공까지의 행정절차를 살펴보면 육군성-조선주차군사령부-진해만요새사령부-축성부 본부-지부(支部)의 순으로 진행되었다.
진해만 군항 축조를 기점으로 그 이전은 제3임시축성단과 임시육군건축지부가 담당했고, 군항 공사가 완료된 이후로는 상시기구인 축성부 관할로 넘겨져서 축성부 본부 임시파출소, 축성부 진해만지부, 축성부 진해만출장소, 부산출장소 등의 순으로 공사를 주관하였다. 이 당시 외양포포대 및 저도포대의 조속한 완공을 위해서 일본인 청부업자인 나카타니 히로키치(中谷廣吉)가 공사를 맡았다. 부산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일본인 청부업자인 나카타니 이외에도 유력 청부업자들이 군사시설을 수주하여 식민화에 앞장섰다. 군사시설의 특성상 한국인 청부업자는 전무한 상황이며 물론 한국인의 고용 역시 허드렛일을 위주로 고용된 사례가 나타나고 있다. 또한 제3임시축성단의 지휘 아래 나카타니가 공사를 청부하여 동일한 과정으로 준공한 영흥만요새의 호도(虎島)요새에서 확인된 한국인 강제동원의 사례로 짐작컨데 외양포 및 저도포대 역시 현지 주민들이 포대공사에 강제적으로 노무 동원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 동안 부산・진해만요새를 유지하던 일제는 태평양전쟁이 임박해오자 기존의 포대 이외에 군사요충지에 수많은 동굴을 파기 시작했다. 해안에서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한 동굴의 형태로 가덕도 대항 일대, 거문도, 제주도 등 해안근처에 수많은 동굴진지가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던 시기에 축조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동굴진지 공사에 수많은 한국인들이 강제동원 되어 한국인의 삶은 피폐하기 그지없었다. 이후 태평양전쟁의 일본 패전으로 일본의 잔재를 정리할 틈도 없이 미군정이 군사시설 및 무기들을 접수한 후 한국군에게 이양하게 되었다. 국방부로 귀속된 일부 군유지들은 토지의 소유권을 제외한 가옥만을 민간에게 불하하거나 지자체로 소유권을 이관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와 같이 일제는 한반도를 전쟁의 발판으로 삼아 수많은 포대 및 군사시설을 구축하였다. 이처럼 일본군이 한반도에 남겨놓은 수많은 군사시설은 비록 일제의 수탈행위의 소산이고, 식민통치의 아픈 상흔이지만, 우리 근대사의 생생한 현장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에 현재까지도 남아있는 일제의 상흔을 징비(懲毖)적 차원으로 살펴보고, 당시의 폐단을 교훈으로 삼아 두 번 다시 국가가 소멸되는 아픔을 겪어서는 안 될 것이다.
목차
제 1 장 서 론 1 1.1. 연구의 배경 및 목적 1 1.2. 연구의 방법 및 범위 5 1.3. 선행연구의 검토 21 제 2 장 조선시대 일본의 한반도 침략과 주둔 24 2.1. 임진왜란과 왜군의 침탈 24 2.1.1. 왜군의 부산 상륙과 침탈 24 2.1.2. 동남해안지역 왜성 축조와 주둔 25 2.2. 강화도조약과 일제의 강요 28 2.2.1. 부산항 개항과 주요 해안의 측량 28 2.2.2. 청일전쟁과 한국주차대의 증편 40 제 3 장 러일전쟁과 일제의 부산진해만 점거 46 3.1. 동남해안지역의 전략적 중요성 46 3.1.1. 한일의정서와 일제의 군용지 선점 46 3.1.2. 대한해협 방어를 위한 거점 구축 49 3.2. 부산진해만요새의 본격적인 구축 63 3.2.1. 진해군항 확장과 주변 포대의 강화 63 3.2.2. 진해만요새사령부의 주민 통제와 검열 77 제 4 장 일제의 요새 구축을 위한 군용지 수용 84 4.1. 부산진해만 일대의 군용지 선정과 수용 84 4.1.1. 일본 육군성의 군용지 조사요령 84 4.1.2. 가덕도 일원의 토지 강제수용 사례 90 4.2. 대한제국의 행정 조치와 강제 퇴거 106 4.2.1. 불합리한 민가등급표 106 4.2.2. 강제퇴거 주민의 저항 115 4.3. 해방이후 잔유 요새와 군용지 처리 121 4.3.1. 한국해군 군유지로의 귀속 121 4.3.2. 병영과 막사 등의 민간 불하 123 제 5 장 육군성 축성부의 요새 건설과 일본인 청부업자 128 5.1. 육군성 축성부의 조직과 업무 128 5.1.1. 축성부의 창설과 업무 128 5.1.2. 시기별 조직
발행 정보
2021. 부산대학교 대학원 국내박사 학위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