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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8세기 결부제의 폐단과 숙종조 황해도 방전법 시도

연구 요약

연구 요지 (AI)
조선 후기 결부제의 폐단과 황해도 방전법 시행을 연구했다.
초록
한국 중세 국가의 지배 및 수취의 핵심은 결부제로 운영되던 田政이었다. 田政은 量田制과 收稅制로 구성되었으며, 국가가 민인을 토지에 긴박하고 조세를 수취하는 것이 골자였다. 그런데 결부제는 인간의 주관성과 자의성이 개입될 여지가 컸기 때문에, 향촌 세력가와 수령과 이서 등이 결탁하여 온갖 폐단을 일으키고 있었다. 대책으로서 황해도 관찰사 유집일이 1701년(숙종 27)에 강령·옹진·은율에서 방전법을 시도하였다. 방전법은 모든 토지를 방전으로 구획하여 측량하는 방식이었다. 숨겨졌던 토지를 모두 색출하여 파악된 토지가 몇 배나 증가했지만, 지주들의 이익을 크게 침해하여 확대 시행되지 못하였다. 그 역사적 의미가 작지 않지만, 자료의 제약으로 인해 충분히 연구되지 못한 실정이다. 그런데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유일본이 소장된 19세기 관료 兪致範의 󰡔一哂錄󰡕 속에서 방전법에 관한 자료가 확인되어 방전법의 내막과 지향을 분석할 수 있게 되었다.
조선 말기 고위관료였던 유치범은 19세기 중엽 삼정문란을 해결할 방법으로 방전법에 주목하며 170여년 전에 황해도에서 시도되었던 유집일의 장계와 「方田條例」 21조를 자신의 문집 󰡔一哂錄󰡕에 수록하였다. 󰡔一哂錄󰡕에 따르면, 유집일은 图帳과 字夫單子를 작성하여 소유권 분쟁을 적극 조정하려 하였다. 图帳을 그려 군현의 지도를 작성하고 산과 들의 경계도 분명히 하여 산림천택까지 포함하는 전 국토를 파악하게 되면, 중앙정부가 전 국토의 재원을 장악하고 관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곧 정부가 공식적으로 모든 민인을 직접 지배하고 모든 재원을 직접 수취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방전법이 당시 田政의 모순을 해결할 획기적인 제도였던 점은 방전이 量田의 단위이자 收稅의 단위였다는 데 있었다. 조선 후기 量田과 收稅의 단위가 일치하지 않았고 수세 행정에서는 온갖 농간과 포흠이 발생하고 있었다. 그런데 하나의 字가 부여된 한 개의 방전이 양전의 단위이자 수세의 단위가 되면 기왕의 폐단은 일소될 수 있었다. 유집일은 방전법의 주체를 토지를 넉넉히 소유하고 있고 결부 계산을 잘하는 사람 중 선정된 字夫로 설정하였다.
또한 명나라 초기에 시행하였던 토지 분급 제도를 도입하여 字夫를 적극적으로 지원·육성하고자 하였다. 비록 방전법은 황해도 3개 읍에서 시험 시행되었을 뿐, 확대 시행되지 못하였으나, 봉건 해체기에 접어든 집권적 봉건 국가의 잔존한 봉건적인 지배를 일소하며 正經界·均賦均稅를 지향했던 개혁정책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리고 경자양전의 타량 방식에도 영향을 미쳐, 보다 정확하게 토지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방전법은 좌절 이후에도 탁월한 양전 방식으로 조정에서 거론되었고, 19세기 정약용·서유구·김윤식·유치범·유진억·이기 등의 방전론으로 이어져 광무양전 논의에 이르렀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발행 정보

2019. 연세대학교 대학원 국내석사 학위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