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 요약
연구 요지 (AI)
일제강점기 낙동강 하류 치수사업과 지역사회의 대응을 연구했다.
초록
한말 한국을 강점하기 위한 준비작업에 착수한 일제는 1905년 하천에 대한 실지 조사를 실시하고 이를 바탕으로 치수책(治水策)을 구상하였다. 흔히 치수는 하천을 다스려 홍수를 예방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당시 조사반의 ‘치수’는 사실상 ‘수리(水利)’를 위한 것 혹은 ‘수리 그 자체’를 의미했다. 일제의 첫 하천정책은 ‘수리’로 시작되었다. 「수리조합조례」(1907)를 제정, 수익예정자를 사업의 주체로 하는 수리조합 사업을 통해 미곡증산과 경지의 확보를 위한 수리공사를 수익자 부담으로 추진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이때 실시된 설치공사는 많은 부분이 수해를 예방하기 위한 축제(築堤)나 하천정리사업과 같은 치수공사였다. 수리조합의 ‘수리’는 ‘치수’와 동일한 단어는 아니었으나, 적어도 거의 유사한 단어였다. 홍수의 피해가 컸던 낙동강 하류부의 수리조합들에게 ‘수리’는 더욱 ‘치수’와 가까운 의미였고, 설치사업은 곧 방수사업이기도 했다. 한국을 강제병합한 일제는 1914년 「하천취체규칙」을 발포하고 하천조사를 시작으로 하는 하천정책을 본격적으로 시행하였다. 하천조사사업은 1915년부터 주요 14개 하천을 대상으로 본격적으로 실시되었다. 하천유로의 확정, 홍수의 방지, 하천의 이용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치수사업의 첫걸음이었다.
제1차 하천조사사업은 1915년부터 1928년까지 시행되었으며 조사의 결과는 조선하천조사서(1929)로 완성되었다. 이 시기 시행된 낙동강 조사사업을 통해 일제는 낙동강 개수의 효과를 낙관하였다. 치수사업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면 낙동강 연안의 황무지를 비옥한 토지로 바꿀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낙동강 협착부 개착과 제방 공사, 남강 방수로 공사 등의 개수공사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관개수리와 관련된 하천조사가 시작되었던 일제초기부터 제1차 하천조사사업이 종료되는 1920대 중반까지의 시기는 말 그대로 ‘조사’가 이루어지는 시기였다. 조사가 시행되는 동안에도 수해는 매년 발생했다. 총독부는 하천조사기간 동안에 발생하는 시급하고도 불가피한 치수 문제를 수리조합의 설치공사를 통해 지역별‧구역별로 해결하고자 하였다. 치수의 문제를 개인에게 부담시키고, 수익성이 높은 조합구역 내의 치수만을 시야에 둔 매우 임시방편적인 치수정책이었다. 그리고 이때의 치수 대상 구역은 김해수리조합고 같이 일본인의 토지가 위치한 곳들이었다. 하지만 1910년대에 행해졌던 수리조합의 치수사업이 조선인 위주의 개발재난을 오히려 양산하게 되면서 지역사회 내에서는 일본인과 조선인 간의 민족별 갈등이 더욱 노정되는 상황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일제시기 치수와 수리는 서로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은 채 모호하게 전개되어 나갔다. 행정기구의 변동과 하천 관련 사무분장에서 나타나는 치수와 수리의 모호성도 이러한 사실을 충분히 보여준다. 치수와 수리는 완전히 분리될 수 없는 사업이었다. 1920년대 산미증식계획이 시작되면서 일제의 치수정책은 적극성을 띄게 되었다. 일제는 우선 수리조합사업을 더욱 활발하게 추진하였다. 이로 인해 낙동강 연안에도 1910년대 후반~1920년대 전반의 시기에 대저‧하동‧양산‧하남수리조합이 차례로 창설되었고, 각각의 구역에 치수‧수리를 위한 설치사업을 실시해 나갔다. 하지만 이러한 치수 방식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었다. 이러한 한계 속에서 발생한 1925년의 을축년 대홍수는 일제로 하여금 더이상 총독부 주도의 하천정책을 미룰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했다. 일제는 주요 6개 직할하천을 선정하고 1925년에는 만경강‧재령강, 1926년에는 한강, 낙동강, 대동강, 용흥강 국비하천공사를 실시하였다. 1927년에는 「조선하천령」을 시행하였다. 낙동강개수공사는 1926년부터 1935년까지 10개년 계속사업으로 계획되었다가 1940년 10월 준공을 보게 되었다. 총 15년이 걸린 장기간의 공사였던 것이다. 낙동강 개수사업은 낙동강 하류부 본류의 하천정리를 위주로 한 치수사업으로, 가장 중심이 된 공사는 일천식공사였다.
예산 역시 주요 6개 하천 중 가장 대규모였다. 일제가 낙동강개수공사에 가장 주력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농업공황으로 인한 경기 악화와 대량실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제는 총 5개년의 궁민구제치수사업을 시행하여 직할하천개수사업을 보조하면서 실업자 및 이재민도 구제하는 방식을 구상하였다. 1936년 풍수해가 발생하자 총독부는 중소하천개수사업을 6개년 계속사업으로 실시하였다. 총독부 직할하천개수공사의 특징은 첫째, 총독부 주도 하에 일본인 기술자들이 중심이 되어 시행되는 식민지적 특성이 하천정책에서도 잘 드러난다. 둘째, 공사 직원 및 노동자의 고용 현황에서 식민지적 고용구조가 드러난다. 낙동강개수공사의 경우 민족별 고용 격차와 임금 격차가 존재하였다. 셋째, 공사의 혜택이 주로 일본인과 일부 조선인 지주자본가에게 돌아갔다. 넷째, 비용의 전가와 구제동원을 통해 시행된 공공사업이었다. 총독부 관할 하에 국비로 시행한다던 공공치수사업은 사실상 많은 부분 지역 면민들의 비용 부담을 통해 이루어졌다. 해방이 되자 한국은 식민지 자본주의 유산을 극복하고 국가를 재건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원조에 의한 산업부흥을 목적으로 치수토목사업을 일정 부분 추진해 나갔으나 전반적으로 일제 말기의 정책을 계승하는 정도였다.
낙동강에서도 홍수피해 복구 정책, 수력발전소 건설 논의, 남강 치수공사 논의 등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마저도 한국전쟁으로 인해 이내 중단되었다. 전쟁이 끝나자 전국적으로 도시화, 공업화 경향이 가속화되었다. 낙동강 연안에 위치한 부산은 피란민의 유입으로 특히 도시화의 급속히 전개되었다. 도시화는 물 문제를 발생시켰다. 이승만 정부는 원조를 통해 전후재건사업을 실시하면서 농업용수개발, 수력발전의 건설, 생활용수 확충 등을 고려하였으나 실행되지는 못하였다. 이승만 정부의 경제개발3개년계획과 장면 정부의 경제개발5개년계획 아래 계획된 치수정책들은 박정희 정부의 경제개발계획으로 계승, 현실화되었다. 대표적으로 남강 다목적 댐 개발 구상이 있다. 하지만 해방 이후에도 수해는 끊이지 않았다. 1959년의 태풍 사라호는 엄청난 피해를 남겼다. 이로 인해 정부는 치수정책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박정희 정부는 국가 주도의 제1‧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1962~1971)을 실시하였다. 경제개발계획과 함께 추진된 하천 관련 정책에는 제1‧2차 치수사업5개년계획, 범국민치수사업(시범사업, 제1‧2차 사업), 제1‧2차 전원개발 5개년계획 등이 있었다. 1960년대 전반의 하천정책을 바탕으로 1966년부터는 수자원 종합개발 10개년 계획도 시행되었다. 박정희 정부 아래 낙동강의 물 활용 방식도 다각화되어 나갔다.
정부는 낙동강수역종합계획을 검토하여 수자원의 다목적화를 구상하고 광범위한 국토계획을 수립하고자 하였다. 남강 다목적 댐 건설과 식수난 해결을 위한 상수도 원수 개발이 가장 대표적인 변화였다. 낙동강을 대상으로 한 하천정책은 다각화‧종합화되었다. 두 시기 사이의 이러한 불연속성을 바탕으로 치수정책이 전개되었다. 치수정책의 변화과정에서 나타나는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치수의 주체가 점차 변화해나갔다는 점이다. 한말~일제초기 치수는 지주가 주체가 되어 시행하였다. 「조선하천령」 이후 하천이 국유로 명시되면서 총독부가 하천 소유권을 가진 관리의 주체가 되었다. 해방 이후가 되면 치수정책은 국가 주도로 시행하되, 농민이 치수와 수리의 담당자이자 수세의 부담자가 되었다. 둘째, 치수 주체의 변화 속에서 하천개수사업으로 대표되는 치수정책을 통해 국가(혹은 총독부)가 면 장악력을 높여 나갔다는 점이다. 국가(총독부) 동원체제를 수립하여 치수공사에 면 단위의 노동력을 저임금으로 동원함으로써 국가(총독부) 재정의 취약성을 극복하고, 지역 장악력은 높이는 하나의 방책으로 활용하였다. 셋째, 하천개수로 대표되는 치수사업은 하천 법규의 제정을 기초로 이루어졌으며, 일제시기~해방이후까지 큰 틀이 유지된다는 점이다.
이들 법령은 하천을 일괄하여 관리하는 수계주의가 아닌 구간으로 나누어 관리하는 구간주의를 채택하여 하천관리의 통일성이 결여될 우려가 있었다. 넷째, 하천의 실측조사는 하천을 수치 데이터화 시켜 ‘과학적’‧‘합리적’으로 관리하는 기준이 되었다. 이를 통해 하천이나 물과 관련한 사업을 과학자‧기술자 등 전문가의 영역으로 한정되었다.
목차
Ⅰ. 서론 1 1. 연구대상과 연구현황 1 2. 구성과 자료 10 Ⅱ. 일제의 낙동강 조사와 수리조합의 국지적 치수공사 13 1. 한말 낙동강 하류의 환경과 낙동강 치수책 13 1) 낙동강 하류부 미간지와 일본인 지주‧자본의 유입 13 2) 하천‧수리조사와 낙동강 치수책 25 2. 일제초기 하천관계법 제정과 낙동강 조사사업 36 1) 하천관계법 제정과 행정의 변천 36 2) 지정하천 실측조사와 낙동강 조사 51 3. 국지적 치수공사와 지역사회의 갈등 67 1) 지방비보조 치수공사와 부역 동원 67 2) 지주의 수리사업과 수리조합 치수공사 72 3) 치수공사로 인한 지역사회의 피해와 갈등 94 Ⅲ. 「조선하천령」(1927) 제정과 조선총독부의 하천개수사업 104 1. 산미증식계획과 하천개수계획의 수립 104 1) 산미증식계획과 조선총독부 관료의 치수인식 104 2) 주요하천개수계획과 낙동강 계획 108 2. 을축년(1925) 대홍수와 「조선하천령」의 제정 123 1) 을축년 대홍수와 낙동강 하류부 수해 123 2) 「조선하천령」 제정과 조선총독부 하천관리체제 수립 130 3. 낙동강개수공사의 시행과 성격 138 1) 초량토목출장소의 공사 시행과 구조적 특징 138 2) 개수방식 논쟁과 일천식공사의 시행 158 3) 낙동강 연안의 토지소유분화와 치수 수혜층 170 Ⅳ. ‘개발’을 둘러싼 문제와 관민의 대응 177 1. 일천식공사로 인한 문제의 확대와 지역민의 진정 활동 177 1) 낙동수리조합 신설과 기반시설 이전을 둘러싼 갈등 177 2) 공사로 인한 1930년대 홍수피해의 확대 185 3) ‘개발재난’에 대응
발행 정보
2024. 부산대학교 대학원 국내박사 학위논문